한학자 총재의 세계일보 발언, 역사 왜곡과 언론 사유화 논란
한학자 총재의 세계일보 발언, 역사
왜곡과 언론 사유화 논란
한학자 총재의 지난 7월 8일 세계일보 방문 발언이 유튜브 영상으로 유출되면서, 그 내용에
대한 국민적 비판이 확산되고 있다. 해당 발언은 역사적 사실 왜곡, 특정
종교에 대한 모욕, 그리고 언론을 사적으로 이용하려는 시도라는 점에서 심각한 문제점을 드러냈다. 이 발언은 자신의 교리를 신격화하고, 이를 언론을 통해 확산시키려
했다는 비판을 받고 있다.
1. 역사적 사실 왜곡과
비약적인 주장
한학자 총재는 "천주교가
많은 실패를 했고 실수를 했어. 그래서 천주교권에서 공산당이 나왔다"고
주장했다. 이는 역사적 사실을 심각하게 왜곡한 주장이다. 공산주의는 19세기 중반 산업 혁명으로 인해 발생한 자본가와 노동자 계급 간의 극심한 불평등과 착취에 대한 비판에서 비롯됐다. 카를 마르크스는 자본주의의 모순을 분석하고, 이를 극복하기 위한
수단으로 프롤레타리아 혁명과 공산주의 사회 건설을 주장했다. 또한, 당시
사회 문제에 미온적이었던 종교를 '인민의 아편'이라 규정하며
비판한 바 있다. 한 총재의 주장은 공산주의의 복잡한 사회경제적 배경을 무시하고, 단순히 천주교의 '잘못' 때문에
공산주의가 생겨났다는 매우 비약적인 논리이다.
2. 특정 종교에 대한
모욕적인 발언
한 총재는 발언 후반부에서
"교황을 모시는 게 아니라, 거기는 한참 아래야.
낙원이나 갈까? 천국 못 가"라고 말하며
교황과 가톨릭 신자들을 폄하했다. 이는 전 세계 수십억 명의 가톨릭 신자들을 향한 모욕적인 발언으로, 종교 지도자로서의 자질을 의심하게 한다. 자신의 교리를 우위에 두기
위해 다른 종교의 신성한 가치를 깎아내리는 행위는 종교 간 갈등을 조장하고 사회적 통합을 저해한다.
3. 언론의 공정성 훼손과
사유화 시도
한 총재는 언론사인 세계일보 임원들에게 "독생녀, 한민족 선민 대서사시"와 같은 자신의 교리를 국민들에게 교육하라고 노골적으로 지시했다. 이는
언론사의 기본적인 사명인 객관적 보도와 공정성을 훼손하고, 특정 교단의 교리 전파 도구로 활용하려는
시도이다. 언론은 특정 집단의 사적 이익이나 교리를 대변하는 것이 아니라, 사회의 다양한 목소리를 반영하고 진실을 추구해야 한다. 이러한 지시는
언론의 독립성을 침해하고 국민들의 건전한 판단을 방해하는 행위이다.
결론적으로, 한학자 총재의
발언은 역사적 무지, 타종교에 대한 배타적이고 모욕적인 태도, 그리고
언론을 사유화하려는 의도를 명확히 보여준다. 이러한 발언은 교주의 자질에 대한 의문을 제기하며 사회
전반에 심각한 충격을 주고 있다.
<참조>
유투브 영상
https://www.youtube.com/watch?v=Pk517fZGP0o
[한민족선민대서사시] 비판 – 1
- 청주한씨 기자후예설 비판적 검토 –
본 소고는 『한민족 선민 대서사시 – 독생녀 탄생을 위해 예비된 한민족』(2024)에서 주장하는 청주한씨(淸州韓氏) 기자후예설(箕子後裔說)이
역사적 사실과 사료적 근거에 기초하고 있는지를 구체적이고 비판적으로 검토한다. 독생녀교(공식적으로 ‘하늘부모성회’,
2020.4.4)의 한학자 총재는 독생녀(獨生女) 메시아론을
주장하면서, 한민족의 5천년 역사는 자신을 맞이하기 위한
준비의 역사였다는 주장을 내세우고 있다. 이 같은 주장 속에서 청주한씨가 기자조선(箕子朝鮮)
의 준왕(準王)의 후손이며 한민족의
갑종족(甲種族)이라는 설이 등장한다. 본 소고는 관련된 역사적 사료와 선행연구를 면밀히 검토하여 그 역사적 진실성을 평가하고자 한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청주 한씨의 기자조선 유래설은 조선 광해군 때에 만들어진 ‘허구’이다. 청주 한씨의
족보에는 여러 버전이 있고, 심지어 고려 태조 왕건을 도와 개국공신이 되면서 성씨를 하사받았다는 주장에도
여러 다른 설이 존재한다. 이러한 상황에서 청주 한씨가 한민족의 갑종족이라는 주장은 중국 고대사와 춘추전국시대
역사를 아는 전공학자들이 볼 때, 역사적 사실을 멋대로 해석하는 곡학아세(曲學阿世)에 불과한 것이다. 차라리
한고조 유방(劉邦)을 도와 한(漢)나라 건국의 공신이 된 한신(韓信) 대장군이나 전국시대 한(韓) 나라
출신인 장량(張良, 張子房)이
청주 한씨의 조상이라고 주장하는 것이 더 설득력이 있을 것이다.
역사적으로 춘추시대 초기에 한(韓)씨
부족은 중국 중원 지역에 존재했다. 이들은 진(晉)나라를 구성하는 유력 씨족 집단이었고, 춘추시대 말기에는 진(晉)나라가 조(趙), 위(魏), 한(韓) 삼국으로 분리될 때 한(韓)나라로 독립했다. 초한지(楚漢志)에 등장하는 한신과 장량이 바로 이 한(韓)나라의 유민이다. 단순히 한(韓)이라는 성씨나 한자가 붙는다고 해서 무조건 청주 한씨의 조상으로 연결하는 것은 역사에 대한 무지를 드러내는 것이다.
먼저, 고려시대까지의 사료에서 청주한씨가 기자의 후손이라는 어떠한 기록도
존재하지 않으며, 오히려 『고려사』의 열전에서는 청주한씨의 원류로서 기자(箕子)가 아닌 한강(韓康)이라는 인물을 명시하고 있다. 김병인의 연구(2019)에 따르면 고려시대의 『고려사』에서 등장하는 한씨는 기자와 전혀 관련이 없으며, 후대에 정치적, 사회적 목적을 위해 기자후예설이 창안되었다고 지적하고
있다.
둘째, 조선 중기 이후 특히 임진왜란 직후인 광해군 시기에 청주한씨의 기자후예설이
본격적으로 등장하였다. 김태윤(2010)은 당시 조선에서
중화사상이 고조되고 기자 숭배가 확산됨에 따라 기자를 숭상하는 정치적 분위기와 맞물려 일부 가문들이 기자의 후손임을 자처하기 시작하였다고 분석한다. 특히, 청주한씨는 정곤수, 기자헌
등의 인물들이 중국의 사서인 『위략(魏略)』 과 『위지(魏志)』를 의도적으로 잘못 인용하거나 왜곡하여 기자후예설을 족보에
반영하였다고 밝혀냈다.
셋째, 강민식의 연구(2013)에
따르면, 청주한씨의 족보는 17세기 초반부터 기자의 후손이라는
내용을 명시하고 있지만, 실제 역사적 사료와의 비교 검증에서는 많은 모순점이 발견된다. 17세기 초반의 『청주한씨세보』(1617년 간행)에 처음으로 기자후예설이 등장하였으나, 이는 역사적 사실과 무관한
창작된 기록에 불과했다. 더 나아가 18세기 말 이후의 족보에서는
기자에서 황제헌원(黃帝軒轅)까지 계보를 인위적으로 확장하여
중국의 고대 황실까지 계보를 소급하는 등, 역사적으로 근거 없는 허구를 창작한 사례가 나타난다.
넷째, 고려시대 사료에 등장하는 청주한씨의 실제 시조는 삼한공신 한란(韓蘭)으로 기록되어 있으며, 이는
고려 말기 이색(李穡)의 묘지명에서 처음 등장한다. 그러나 청주한씨의 시조 한란은 고려사 기록이나 당대의 다른 사료에서 찾기 어려우며, 후대 족보에서만 등장하는 점에서 그 역사적 신뢰성이 낮다고 평가된다. 따라서
청주한씨가 기자를 선조로 삼은 것은 임진왜란 이후, 혈통적 우월성과 군역 면제 등 정치적 이익을 얻기
위한 전략적 선택이었다는 평가가 가능하다.
다섯째, 기자후예설이 확산된 정치적·사회적
배경으로 조선 후기 중화사상이 있다. 명나라 멸망 이후 중화의 계승자로서의 정통성을 강조하려는 정치적
분위기가 형성되면서, 많은 사대부들이 자신들의 가계를 중국의 기자에 연결시키고자 하였으며, 청주한씨 역시 이런 경향 속에서 기자후예설을 적극적으로 수용하였다. 그러나
당시에도 학자들 사이에서 기자후예설에 대한 회의와 비판이 존재하였으며, 대표적으로 한백겸(韓百謙) 같은 학자는 청주한씨임에도 기자후예설을 전혀 언급하지 않았다. 이러한 점에서 기자후예설이 당대에도 역사적 신빙성이 없다고 인식되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나아가 『한민족선민대서사시』에 등장하는 단군조선(檀君朝鮮), 기자조선(箕子朝鮮), 위만조선((衛滿朝鮮)에 대한 서술 역시 고조선에 대한 이해의 부족을 드러내고
있다. 이 책에서 보여주는 ‘고조선’에 대한 이해는 식민사관과 중화사대사관을
그대로 반영하고 있으며, 이는 한민족의 정통 역사관에서 배격되어야 할 관점이다. 일연의 『삼국유사』에 나오는 고조선과 단군신화 관련 부분, 사마천의
『사기』에 나오는 기자 관련 부분만 제대로 이해했어도, 고조선과 기자의 관계를 이처럼 식민사관과 중화사대사관의
관점으로 설명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종합적으로 볼 때, 『한민족 선민 대서사시』의 청주한씨 기자후예설은 역사적
사실을 근거로 한 것이 아니라, 조선 중기 이후 정치적·사회적
필요성에 의해 만들어진 허구적 족보 기록이다. 이를 역사적 사실처럼 활용하여 독생녀 메시아론의 근거로
삼는 것은 심각한 역사 왜곡이며, 학술적이고 역사적인 엄밀성을 결여한 주장이라 할 수 있다.
청주한씨의 기자후예설은 역사적 근거가 없는 정치적, 사회적 목적에 따라 형성된
일종의 족보 신화이며, 이를 근거로 민족의 선민성이나 독생녀 메시아론을 주장하는 것은 분명한 역사 왜곡이다. 『한민족 선민 대서사시』라는 책을 버젓이 비싼 광고비를 지불하면서 홍보하는 용기는 어디에서 나왔는지, 그 배짱은 높이 살만하다. 하지만 이렇게 신문에 대대적으로 광고를
하면, 관련 학계나 단체들로부터 사이비역사학(似而非歷史學, pseudo-history)으로 엄중한 이론적 공격을 받게 될 것이다. 그때에는
하늘부모성회 교단에서 신자들에게 세뇌하는 강의와 집단최면으로는 통용되지 않을 것이다. 따라서 우리는
역사적 사실에 근거한 엄밀한 역사 인식과 비판적 태도를 가져야 한다는 점을 다시 한번 강조한다.
참고문헌:
강민식, 「청주한씨의
연원과 시조 전승」, 『장서각』 제30집, 2013
김병인, 「청주한씨 ‘기자후예설’ 재검토」, 『한국사학보』
제74호, 2019
김태윤, 「조선후기
청주한씨족보로 본 기자와 기자조선 인식」, 중앙대학교
석사학위논문,
2010
천무원, 『한민족
선민 대서사시 – 독생녀 탄생을 위해 예비된 한민족』, 천원사, 2024
[韓民族選民大叙事詩] 批判–1
- 清州韓氏箕子後裔説の批判的検討 –
本稿では『韓民族選民大叙事詩–独生女誕生の為に備えられた韓民族』(2024)が主張する清州韓氏箕子後裔説が歴史的事実と史料的根拠に基づいているか否かを具体的かつ批判的に検討する。独生女教(正式名称「天の父母様聖会」2020年4月4日)の韓鶴子総裁は、独生女メシヤ論を主張しながら、韓民族の五千年の歴史は自身を迎える為の準備の歴史であったとする主張を押し立てている。このような主張の中で、清州韓氏が箕子朝鮮の準王の子孫であり、韓民族の甲種族であるという説が登場する。本稿では、関連する歴史的史料と先行研究を綿密に検討し、その歴史的真実性を評価してみる。
結論から言うと、清州韓氏の箕子朝鮮由来説は朝鮮王朝光海君時代に作られた「虚構」である。清州韓氏の族譜には複数のバージョンがあり、高麗王朝の太祖王建を助け開国功臣となり姓を下賜されたという主張にも様々な異説がある。このような状況下において、清州韓氏が韓民族の甲種族であるという主張は、中国の古代史と春秋戦国時代の歴史を知る専門学者から見れば、歴史的事実を恣意的に解釈する曲学阿世に過ぎない。寧ろ漢の高祖劉邦を助け漢建国の功臣となった韓信大将軍や、戦国時代の韓の国出身の張良(張子房)が清州韓氏の祖先だと主張する方がより説得力があるだろう。
歴史的に春秋時代初期に韓氏部族は中国の中原地域に存在した。彼らは晋の国を構成する有力氏族集団であり、春秋時代末期には晋が趙・魏・韓の三国に分裂する際に韓の国として独立した。『楚漢志』に登場する韓信と張良こそがこの韓の国の遺民である。単に韓という姓や漢字が付くからといって、無条件に清州韓氏の祖先と結びつけるのは歴史に対する無知を露呈するものである。
まず、高麗時代までの史料においては「清州韓氏が箕子の子孫である」という如何なる記録も存在せず、寧ろ『高麗史』の列伝では清州韓氏の源流として箕子ではなく韓康(ハン・ガン)という人物を明示している。金ビョンインの研究(2019)によれば、高麗時代の『高麗史』に登場する韓氏は箕子と全く関係がなく、後世に政治的・社会的目的の為に箕子後裔説が創出されたと指摘している。
第二に、朝鮮王朝中期以降の特に壬辰倭乱(文禄の役)直後の光海君時代に、清州韓氏の箕子後裔説が本格的に登場した。金テユンの研究(2010)では、当時朝鮮で中華思想が高揚し箕子崇拝が拡散されるにつれて箕子を尊崇する政治的雰囲気と相まって一部の家門が箕子の後裔であることを自称し始めたと分析し、特に清州韓氏は鄭崑壽(チョン・ゴンス)や奇自獻(キ・ジャホン)といった人物たちが中国の史書である『魏略』と『魏志』を意図的に誤引用または歪曲し、箕子後裔説を族譜に反映させたものと解明している。
第三に、姜ミンシクの研究(2013)によれば、清州韓氏の族譜は17世紀初頭から箕子の子孫であるという内容を明記しているものの、実際の歴史的史料との比較検証では多くの矛盾点が発見される。17世紀初頭の『清州韓氏世譜』(1617年刊行)に初めて箕子後裔説が登場したが、これは歴史的事実とは無関係な創作された記録に過ぎなかった。さらに18世紀末以降の族譜では、箕子から黄帝軒轅(こうていけんえん)にまで系譜を人為的に拡張して中国の古代皇室にまで系譜を遡及するなど、歴史的根拠の無い虚構を創作した事例が現れている。
第四に、高麗時代の史料に登場する清州韓氏の実際の始祖は三韓功臣の韓蘭(ハン・ラン)と記録されており、これは高麗王朝末期の李穡(イ・セク)の墓誌銘において初めて登場する。しかし、清州韓氏の始祖である韓蘭は、高麗史の記録や当代の他の史料では見つけ難く、後代の族譜にのみ登場する点から、その歴史的信頼性は低いと評価される。したがって、清州韓氏が箕子を先祖としたのは、壬辰倭乱以降に血統的優越性や軍役免除などの政治的利益を得る為の戦略的選択であったと評価することが可能である。
第五に、箕子後裔説が拡散した政治的・社会的背景として、朝鮮王朝後期の中華思想がある。明朝滅亡後は中華の継承者としての正統性を強調しようとする政治的雰囲気が形成され、多くの士大夫たちが自らの家系を中国の箕子に結びつけようとしたが、清州韓氏もこうした傾向の中で箕子後裔説を積極的に受容した。しかし当時においても学者たちの間では箕子後裔説に対する懐疑と批判が存在し、その代表例として韓百謙(ハン・ベッキョム)のような学者は清州韓氏でありながら箕子後裔説について全く言及しなかった。この点から、箕子後裔説が当時においても歴史的信憑性がないと認識されていたことが分かる。
さらに『韓民族選民大叙事詩』に登場する檀君朝鮮、箕子朝鮮、衛満朝鮮に関する記述もまた、古朝鮮に対する理解の不足を露呈している。本書が示す「古朝鮮」に対する理解は、植民地史観と中華事大主義史観をそのまま反映しており、これは韓民族の正統な歴史観において排除されるべき視点である。一連の『三国遺事』に出てくる古朝鮮と檀君神話関連部分、司馬遷の『史記』に出てくる箕子関連部分だけでも正しく理解していたなら、古朝鮮と箕子の関係をこのように植民地史観や中華事大主義史観の観点から説明することはなかったであろう。
総合的に見ると、『韓民族選民大叙事詩』の清州韓氏箕子後裔説は、歴史的事実に基づいたものではなく、朝鮮中期以降の政治的・社会的必要性によって作られた虚構的な族譜記録である。これを歴史的事実のように活用して独生女メシヤ論の根拠とするのは深刻な歴史歪曲であり、学術的・歴史的な厳密性を欠いた主張と言わざるを得ない。
清州韓氏の箕子後裔説は歴史的根拠のない政治的・社会的目的に基づいて形成された一種の系譜神話であり、これを根拠に民族の選民性や独生女メシヤ論を主張することは明らかな歴史歪曲である。『韓民族選民大叙事詩』という本を堂々と高額な広告費を支払って宣伝する勇気はどこから出て来たのか、その度胸は高く評価するに値するとしても、このように新聞に大規模に広告を出すと、関連の学界や諸団体から疑似歴史学(pseudo-history)として厳重な理論的攻撃を受けることになるだろう。その時には天の父母様聖会教団が信者たちに洗脳する講義や集団催眠では通用しないだろう。したがって我々は歴史的事実に基づいた厳密な歴史認識と批判的態度を持つべきだという点を再度強調する。
参考文献:
姜ミンシク「清州韓氏の淵源と始祖伝承」『蔵書閣』第30集2013
金ビョンイン「清州韓氏『箕子後裔説』再検討」『韓国史学報』第74号2019
金テユン「朝鮮王朝後期の清州韓氏族譜から見た箕子と箕子朝鮮の認識」中央大学校修士学位論文2010
天務院『韓民族選民大叙事詩–独生女誕生の為に備えられた韓民族』天苑社2024
청주 한씨의 기자조선 유래설은 조선 광해군 때에 만들어진 ‘허구’이다. 청주 한씨의
족보에는 여러 버전이 있고, 심지어 고려 태조 왕건을 도와 개국공신이 되면서 성씨를 하사받았다는 주장에도
여러 다른 설이 존재한다. 이러한 상황에서 청주 한씨가 한민족의 갑종족이라는 주장은 중국 고대사와 춘추전국시대
역사를 아는 전공학자들이 볼 때, 역사적 사실을 멋대로 해석하는 곡학아세(曲學阿世)에 불과한 것이다. 차라리
한고조 유방(劉邦)을 도와 한(漢)나라 건국의 공신이 된 한신(韓信) 대장군이나 전국시대 한(韓) 나라
출신인 장량(張良, 張子房)이
청주 한씨의 조상이라고 주장하는 것이 더 설득력이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