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민족대서사시 비판 - 청주한씨 기자후예설 비판적 검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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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민족대서사시] 비판 - 청주한씨 기자후예설 비판적 검토 –


본 소고는 『한민족 선민 대서사시』에서 주장하는 청주한씨 기자후예설이 역사적 사실과 사료적 근거에 기초하고 있는지를 구체적이고 비판적으로 검토한다.


 독생녀교(공식적으로 ‘하늘부모성회’)의 교주 한학자는 독생녀 메시아론을 주장하면서, 한민족의 5천년 역사는 자신을 맞이하기 위한 준비의 역사였다는 주장을 내세우고 있다. 이 같은 주장 속에서 청주한씨가 기자조선의 준왕의 후손이며 한민족의 갑종족(甲種族)이라는 설이 등장한다. 본 소고는 관련된 역사적 사료와 선행연구를 면밀히 검토하여 그 역사적 진실성을 평가하고자 한다.


먼저, 고려시대까지의 사료에서 청주한씨가 기자의 후손이라는 어떠한 기록도 존재하지 않으며, 오히려 『고려사』의 열전에서는 청주한씨의 원류로서 기자가 아닌 한강(韓康)이라는 인물을 명시하고 있다.  김병인의 연구(2019)에 따르면 고려시대의 『고려사』에서 등장하는 한씨는 기자와 전혀 관련이 없으며, 후대에 정치적, 사회적 목적을 위해 기자후예설이 창안되었다고 지적하고 있다.


둘째, 조선 중기 이후 특히 임진왜란 직후인 광해군 시기에 청주한씨의 기자후예설이 본격적으로 등장하였다. 김태윤(2010)은 당시 조선에서 중화사상이 고조되고 기자 숭배가 확산됨에 따라 기자를 숭상하는 정치적 분위기와 맞물려 일부 가문들이 기자의 후손임을 자처하기 시작하였다고 분석한다. 특히, 청주한씨는 정곤수, 기자헌 등의 인물들이 중국의 사서인 『위략(魏略)』 과 『위지(魏志)』를 의도적으로 잘못 인용하거나 왜곡하여 기자후예설을 족보에 반영하였다고 밝혀냈다.


셋째, 강민식의 연구(2013)에 따르면, 청주한씨의 족보는 17세기 초반부터 기자의 후손이라는 내용을 명시하고 있지만, 실제 역사적 사료와의 비교 검증에서는 많은 모순점이 발견된다. 17세기 초반의 『청주한씨세보』(1617년 간행)에 처음으로 기자후예설이 등장하였으나, 이는 역사적 사실과 무관한 창작된 기록에 불과했다. 더 나아가 18세기 말 이후의 족보에서는 기자에서 황제헌원까지 계보를 인위적으로 확장하여 중국의 고대 황실까지 계보를 소급하는 등, 역사적으로 근거 없는 허구를 창작한 사례가 나타난다.


넷째, 고려시대 사료에 등장하는 청주한씨의 실제 시조는 삼한공신 한란(韓蘭)으로 기록되어 있으며, 이는 고려 말기 이색(李穡)의 묘지명에서 처음 등장한다. 그러나 청주한씨의 시조 한란은 고려사 기록이나 당대의 다른 사료에서 찾기 어려우며, 후대 족보에서만 등장하는 점에서 그 역사적 신뢰성이 낮다고 평가된다. 따라서 청주한씨가 기자를 선조로 삼은 것은 임진왜란 이후, 혈통적 우월성과 군역 면제 등 정치적 이익을 얻기 위한 전략적 선택이었다는 평가가 가능하다.


다섯째, 기자후예설이 확산된 정치적·사회적 배경으로 조선 후기 중화사상이 있다. 명나라 멸망 이후 중화의 계승자로서의 정통성을 강조하려는 정치적 분위기가 형성되면서, 많은 사대부들이 자신들의 가계를 중국의 기자에 연결시키고자 하였으며, 청주한씨 역시 이런 경향 속에서 기자후예설을 적극적으로 수용하였다. 그러나 당시에도 학자들 사이에서 기자후예설에 대한 회의와 비판이 존재하였으며, 대표적으로 한백겸 같은 학자는 청주한씨임에도 기자후예설을 전혀 언급하지 않았다. 이러한 점에서 기자후예설이 당대에도 역사적 신빙성이 없다고 인식되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종합적으로 볼 때, 『한민족 선민 대서사시』의 청주한씨 기자후예설은 역사적 사실을 근거로 한 것이 아니라, 조선 중기 이후 정치적·사회적 필요성에 의해 만들어진 허구적 족보 기록이다. 이를 역사적 사실처럼 활용하여 독생녀 메시아론의 근거로 삼는 것은 심각한 역사 왜곡이며, 학술적이고 역사적인 엄밀성을 결여한 주장이라 할 수 있다.


결론적으로, 청주한씨의 기자후예설은 역사적 근거가 없는 정치적, 사회적 목적에 따라 형성된 일종의 족보 신화이며, 이를 근거로 민족의 선민성이나 독생녀 메시아론을 주장하는 것은 분명한 역사 왜곡이다. 따라서 우리는 역사적 사실에 근거한 엄밀한 역사 인식과 비판적 태도를 가져야 한다는 점을 다시 한번 강조한다.


참고문헌:

김병인, 「청주한씨 ‘기자후예설’ 재검토」, 『한국사학보』 제74호, 2019, pp. 40-43.

강민식, 「청주한씨의 연원과 시조 전승」, 『장서각』 제30집, 2013, pp. 322-325.

김태윤, 「조선후기 청주한씨족보로 본 기자와 기자조선 인식」, 중앙대학교 석사학위논문, 2010, pp. 1-4.

『한민족 선민 대서사시』, 세계평화통일가정연합, pp. 22-27.



위에 올린 글의 결론은, 청주 한씨의 기자조선 유래설은 조선 광해군 때에 만들어진 ‘허구’라는 것입니다. 청주 한씨의 족보에는 여러 버전이 있고, 심지어 고려 태조 왕건을 도와 개국공신이 되면서, 왕건으로부터 성씨를 하사 받았다는 주장에도 여러 다른 설이 있다는 것입니다. 청주 한씨가 한민족 갑종족이라는 주장도, 중국의 고대사와 춘추시대 초기의 역사를 아는 고대사 전공학자들이 볼 때, 웃기지도 않은 주장입니다. 


차라리 유방을 도와서 한(漢)나라 건국의 공신이 된 한신 대장군이나 전국시대 한(韓) 나라 출신인 장량(楚漢誌에 張子房으로 알려져 있는)이 청주 한씨의 조상이라고 주장하는 것이 더 설득력이 있을 것입니다.


춘추시대 초기에 한(韓)씨의 부족이 중국 중원지역에 있었습니다. 춘추시대에는 진(晉 – 진시황의 秦이 아님) 나라를 구성하는 유력 씨족집단으로 있다가, 전국시대 초기에 진(晉)나라로부터 조(趙)나라, 위(魏)나라, 한(韓)나라 삼국으로 분립이 됩니다. 초한지(楚韓誌)의 한신 대장군과 장량(장자방)은 이 한(韓)나라의 유민입니다.


한(韓)이라는 성씨나 한문 글자가 붙으면, 무조건 청주 한씨의 조상이라고 붙이는 것은 무식의 정도를 훨씬 뛰어넘은 것입니다. 미치광이의 헛소리와도 같은 것입니다.


이 책에 등장하는 단군조선, 기자조선, 위만조선도 고조선에 대한 이해의 부족을 드러내고 있습니다. 이 책에서 알고 있는 ‘고조선’에 대한 이해는 식민사관과 중화사대사관을 반영하고 있습니다. 일연의 [삼국유사]에 나오는 고조선과 단군신화 관련 부분, 사마천의 [사기]에 나오는 기자 관련 부분만 알아도, 고조선과 기자의 관계를 식민사관과 중화 사대사관의 관점으로 설명하지 않을 것입니다.


무식하면 용감하다고 했습니다. [한민족 선민 대서사시]라는 책을 버젓이 비싼 광고비를 지불하면서 홍보하는 용기는 어디에서 나왔는지, 아무튼 그 배짱은 높이 살만합니다. 이렇게 신문에 대문짝 만하게 광고를 해대면, 관련 학계나 단체들로부터 이론적 공격을 받을 것입니다. 그때에는 독생녀 교단의 무지한 추종자들에게 강의하는 방식으로는 통하지 않습니다. 앞으로 어떻게 대응할지도 흥미로운 구경거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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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주한씨 기자후예설의 역사성과 『한민족 대서사시』의 교리적 왜곡 분석


서론
『한민족 선민 대서사시』는 청주한씨가 기자의 후예라는 주장을 통해 한학자 총재의 독생녀 메시아론을 정당화하려는 시도를 담고 있다. 본 보고서는 이 주장에 대한 역사학적, 종교사적, 문헌학적 관점의 비판과 함께 현대 역사학 및 민족주의 관점에서의 문제점을 분석한다.

1. 역사학적 관점
기자후예설은 고려시대 사료에는 등장하지 않으며, 조선 중기 이후 사대주의와 기자 숭배가 퍼지면서 족보에 삽입되었다. 고려사에는 청주한씨가 기자의 후손이라는 기록이 없고, 기자후예설은 17세기 청주한씨세보에 처음 등장했다. 이는 위략·위지 등의 중국 사서를 자의적으로 인용해 만들어진 가계 신화이다. 조선 후기 학자들과 국왕도 이 설을 비판하거나 인정하지 않았다.

2. 종교사적/신학적 관점
통일교는 한민족을 선민으로 해석하며, 한학자 총재를 독생녀 메시아로 신격화한다. 이 과정에서 청주한씨의 기자후예설은 참모친이 성스러운 혈통에서 태어났다는 증거로 활용된다. 기자는 동양의 성현으로서 신앙 전통의 뿌리로, 단군과 함께 서사화된다. 이는 기독교적 다윗 혈통 메시아론을 연상시키는 구조이지만, 역사적 사실보다 종교적 신념에 기반한 조작이다.

3. 문헌학적 관점
청주한씨 세보는 중국 고서 위략과 위지의 단편적 언급을 확대 해석해 기자 – 준왕 – 우량 – 한란으로 이어지는 가계를 창작했다. 이는 문헌 왜곡과 족보 창작의 사례로, 실증적 검토에서 모순이 드러난다. 실제로 기자후예설은 다양한 성씨 족보에서 공동의 전설로 채택되어 허구적으로 구성되었다.

4. 현대 역사학과 민족주의 시각
기자후예설은 현대 역사학에서는 사료적 근거가 부족한 가계 신화로 평가된다. 민족주의 사관에서는 단군 중심의 자주적 전통을 강조하며, 기자 중심 서사는 중화사대주의로 간주된다. 통일교는 이를 종교적 상징으로 재해석하지만, 학문적·민족사적 측면에서는 부적절한 역사 왜곡이다.

결론
청주한씨 기자후예설은 고려~조선 전기의 정사에 근거하지 않고, 조선 중기 이후 족보 조작을 통해 구성된 신화이다. 통일교는 이를 독생녀 메시아론의 정당화를 위한 서사 장치로 활용하나, 이는 역사 왜곡이며 종교적 조작에 불과하다. 따라서 학문적, 민족사적, 신앙적 영역을 분별하며 비판적으로 수용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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