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책임 시대, 종교인의 양심을 묻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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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책임 시대, 종교인의
양심을 묻다”
문제가 있으면 답이 있고, 병이
있으면 치료법이 있으며, 잘못이 있으면 책임이 따르기 마련이다. 그리고
그 책임을 기꺼이 짊어지려는 사람이 존재할 때, 공동체는 다시 일어설 희망을 품는다. 그러므로 우리가 진정으로 두려워해야 할 것은 문제 그 자체가 아니다. 문제는
산적해 있는데 그 누구도 책임지려 하지 않는 ‘책임의 실종’이야말로
우리 시대가 마주한 진짜 비극이다.
법정의 판결문보다 무거운 '양심의
무게'
며칠 전, 어느 종교
단체를 둘러싼 스승과 제자의 재판 과정을 지켜보며 마음이 무겁게 가라앉았다. 사법부의 최종 판단은 아직
남아 있다. 그러나 법정을 가득 메운 진흙탕 같은 ‘너의
탓’ 공방을 바라보는 내내 한 가지 질문이 머릿속을 떠나지 않았다. ‘과연
이 문제의 진짜 답은 어디에 있는가.’
단언컨대 그 답은 법정의 차가운 판결문 안에만 존재하지 않는다. 진짜 답은 양심과 책임을 철저히 자신의 것으로 대하는 당사자들의 태도 속에 숨어 있다.
사람은 누구나 실수하고 어떤 조직이든 허물을 남긴다. 그러나 건강한 공동체는 잘못이 없어서 건강한 것이 아니다. 잘못을
부끄러워할 줄 알고, 그 무게를 온전히 자신이 책임질 줄 알기에 건강한 것이다. 반대로 모든 책임을 타인에게 돌린 채 자신만은 무결하다고 주장하는 공동체는 스스로 회복의 길을 가로막을 뿐이다. 남을 탓하는 거친 입술만 가득한 공동체에는 치유와 회복의 싹이 돋아날 자리가 없다.
'내 탓이오'를 외친 아름다운 재판들
미국의 한 외딴 시골 마을에는 양심의 무게를 가늠케 하는 오랜 이야기가
전해 내려온다. 두 형제가 장난치며 던진 창이 지나가던 백작의 말을 놀라게 했고, 결국 백작은 말에서 떨어져 목숨을 잃고 말았다. 법정에 선 판사가
두 아이에게 "누가 창을 던졌느냐"고 묻자, 형도 동생도 서로 자신이 던졌다며 죄를 자처했다.
서로 책임을 지겠다는 형제의 기이한 다툼 앞에 결론을 내지 못한
판사는 결국 그들의 어머니를 법정으로 불렀다. 누가 진짜 죄인이냐는 준엄한 질문 앞에, 어머니는 오랜 침묵 끝에 눈물을 머금고 말했다.
"둘째를 처벌해
주십시오."
이 예상치 못한 답변에 판사는 물론 방청객 모두가 술렁였다. 판사가 그 이유를 묻자 어머니는 눈물을 흘리며 말을 이었다.
"큰아이는 전처의
자식이고, 둘째는 제가 낳은 자식입니다. 제 양심은 전처
자식보다 제 핏줄을 먼저 내놓으라고 명령하고 있습니다."
어머니의 진심어린 양심 앞에 깊은 감동을 받은 판사는 "내 양심은 이 아름다운 가족을 모두 살리라고 한다"며
무죄 판결을 내렸다. 법의 서슬 퍼런 칼날보다 먼저 양심의 재판이 승리한 순간이었다.
구약성경 속 '솔로몬의
재판' 역시 본질은 같다. 진짜 어머니는 아이의 생명을 살리기
위해 자신의 소유권과 권리를 포기하고 스스로 죄인이 되기를 선택했다. 자신의 슬픔과 손해보다 아이의
생명을 먼저 품은 그 위대한 양심이, 거짓을 밝혀내고 자신이 진짜 어머니임을 증명해 낸 것이다.
세상이 종교에 기대하는 마지막 품격
미국 시골 마을의 법정도, 솔로몬의
판결도 결국 ‘하나님이 인간에게 준 양심과 사랑의 승리’였다. 그렇다면 세상의 도덕보다 높은 영적 가치를 추구한다는 종교인의 재판은 그보다 더 감동적이고 아름다워야 하지
않겠는가.
만약 그 재판정이 서로를 살리기 위해 무거운 짐을 자기의 것으로
지려는 이들로 가득했다면 어땠을까. 부모는 "자식에게는
책임을 묻지 말고 저를 벌해 달라" 하고, 자식은 "모든 책임은 못난 제게 있다"며 엎드리고, 누나는 동생을 감싸며 동생은 누나의 허물을 덮으려 자기 책임으로 돌리는 재판이었다면 말이다. 법적 결과가 어떠했든, 세상의 시선은 차가운 비난 대신 "역시 종교인은 다르다"는 경외감으로 바뀌었을 것이다.
종교는 남에게 십자가를 떠넘기고 손가락질하는 곳이 아니다. 자신이 먼저 상대의 십자가를 지고 거친 골고다 언덕을 묵묵히 오르는 곳이다.
부모가 자식을 살리고, 스승과 제자가 서로를 위해 자신을 기꺼이 희생하는 모습—이것이 바로 세상이 종교인 앞에 기대하는 마지막 품격이자 존재 이유다.
살아 있는 양심만이 종교를 구원한다
종교인은 누구보다 양심 앞에 절대적으로 벌거벗을 수 있어야 한다. 신앙은 타인의 허물을 들추어내는 외침이 아니라, 자신의 내면을 깊숙이
비추는 거울에서 시작된다. 회개 역시 상대에게 강요하는 권리가 아니라,
나 자신을 향한 엄격한 의무다. 사람은 세상을 속일 수 있고 촘촘한 법망을 빠져나갈 수도
있지만, 자신의 내면에 깃든 양심만큼은 결코 속일 수 없다. 종교가
마지막 순간까지 목숨 걸고 수호해야 할 것은 화려한 권력도, 거대한 조직도, 탐욕스러운 명예도 아니다. 오직
'살아 있는 양심'뿐이다.
양심이 살아 있는 종교는 비록 지금 넘어져도 다시 일어설 희망이
있다. 그러나 양심이 죽어버린 종교는 아무리 웅장한 성전을 자랑할지라도 미래를 말할 수 없다. 양심이 죽으면 회개가 사라지고, 회개가 사라지면 변화가 멈추며, 변화가 없는 공동체는 결국 도태될 뿐이기 때문이다.
희망의 새벽을 여는 한마디,
"제가 책임지겠습니다"
문제가 발생하는 것은 부끄러운 일이 아니다. 진짜 부끄러운 것은 문제 앞에서 책임지는 어른과 바른 제자가 없는 비겁함이다.
공동체를 살리는 힘은 화려한 변명이나 세련된 법적 논리가 아니라 정직한 책임에서 나온다. 무너진
조직을 다시 세우는 것은 상대를 향한 삿대질이 아니라, 자신의 가슴을 치는 통회(痛悔)의 양심이다.
지금 우리 종교가 붙들어야 할 질문은 "누가 더 잘못했는가"가 아니다. 그저 이 한마디면 충분하다.
"제가 책임지겠습니다."
이 짧은 한마디가 무너진 신뢰를 다시 세우고, 절망을 희망으로 바꾸며, 공동체를 다시 일으키는 위대한 출발점이다. 사법부의 법정은 인간의 행위를 판단하지만, 양심의 법정은 인간의
영혼을 심판한다. 양심이 살아 숨 쉬는 한, 그 종교에는
언제나 어둠을 걷어내는 희망의 새벽이 기다리고 있다. 우리에게는 원리와 말씀이라는 다시 세상 앞에 당당히
일어설 무기가 있다. 그러나 그 무기를 도외시한다면 그 단체는 희망이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