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리를 버리고 금송아지 앞에 선 통일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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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리를 버리고 금송아지 앞에 선 통일가
[사설] 원리를 버리고 금송아지 앞에 선 통일가
모세가 시내산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받는 사십 일을 백성은 견디지 못했다. 기다림은 불안이
되었고, 불안은 타협이 되었으며, 타협은 끝내 우상이 되었다. 그들은 제 손으로 녹여 만든 금송아지 앞에 엎드려 그것을 자신들을 인도한 신이라 불렀다. 오늘 통일가가 바로 그 광야에 서 있다. 원리의 돌판은 밀려나고, 그 빈자리에 새로운 금송아지가 번쩍이며 세워지고 있다.
수십 년 동안 통일가의 신앙과 교육을 떠받쳐 온 원리의 기둥이 몇몇 허접한 교수들의 주장과 해석 앞에서 흔들리고 있다. 검증도 없었다. 토론도 없었다. 책임지는
사람도 없었다. 그런데 지도부는 그 설익은 가르침을 앞장서 받아들이고,
확정된 진리인 양 신도들에게 강요하고 있다. 이것은 신앙의 뿌리를 뽑는 일이며, 공동체의 정체성을 스스로 지우는 일이다.
지금까지 믿고 가르쳐 온 핵심을 송두리째 뒤집었다는 비판, 창시자의 가르침을 어린아이의
웃음거리로 만들 만큼 왜곡했다는 비판이 쏟아지고 있다. 그런데도 지도부의 안중에는 현장 목회자들의 목소리가
없다. 검증 없는 참부모론 교본은 권력의 방패가 될 수 없다. 교본은
원리 앞에서 심판받아야 할 문서다. 무엇을 바꾸었는가. 무슨
근거로 바꾸었는가. 누가 그 결과를 책임질 것인가. 이 세
가지 물음에 답하지 못하는 교본은 교본이 아니라 금송아지일 뿐이다.
더욱 참담한 것은 목회자들의 모습이다. 평생 원리의 말씀을 붙들고, 참사랑의 심정으로 눈물 흘리며, 하늘의 진실을 세계 곳곳에 전해
온 바로 그 사람들이 이제 그 가르침과 정면으로 충돌하는 주장 앞에서 춤추고 노래하듯 박수를 치고 있다. 어제
가르친 원리가 진리였다면 오늘의 동조는 배신이다. 오늘의 동조가 옳다면 어제의 가르침은 거짓이었다는
말인가. 그 말씀을 믿고 축복을 받아 가정을 이루고 자녀를 키워 온 축복가정과 후손들 앞에 그들은 무엇이라
답할 것인가.
무능한 지도부는 침묵 뒤에 숨고, 무책임한 지도부는 강압과 허상 뒤에 숨는다. 이제 그 어느 쪽에도 숨을 곳은 없다. 소수의 주장에 기대어 공동체
전체의 신앙을 바꾸려 한다면 그 근거를 공개하고 그 책임을 지라. 질문하는 신도를 불충으로 몰아세우는
순간, 반대하는 목소리를 분열로 낙인찍는 순간, 그 공동체는
진리를 지킬 힘을 스스로 내려놓는 것이다. 질문을 두려워하는 권위는 이미 권위가 아니다.
모세는 금송아지를 보고 하나님이 친히 새기신 돌판마저 분노에 넘쳐 깨뜨렸다. 지금 통일가의
미래도 그 돌판처럼 산산조각 나는 모습이 눈앞에 보이는 듯하다. 우상을 만든 것은 백성의 손이었지만, 우상을 허락한 것은 지도자의 침묵이었다. 아론은 백성이 원해서 했다고
변명했다. 그러나 섭리의 공식은 그 변명을 받아 줄 수 없었다. 오늘
통일가의 지도자와 목회자들은 스스로에게 물어야 한다. 우리는 원리를 지키는 사람들인가, 아니면 권위와 분위기에 떠밀려 금송아지 앞에 줄 선 사람들인가.
영계에 계신 참아버님 앞에 이 모습을 무엇이라 아뢸 것인가. 맨손으로 길을 닦고 핍박 속에서
말씀을 지켜 낸 초창기 선배들 앞에 무엇이라 변명할 것인가. 평생 쌓아 올린 원리를 제 손으로 허물고도
아무 일 없었다는 듯 지나갈 수는 없다.
지금 당장 교본과 가르침을 공개적으로 검증하라. 잘못이 드러나면 바로잡으라. 진리를 왜곡한 책임자는 그 자리에서 물러나라. 지도부는 신도들 앞에
머리 숙여 사과하고 설명하라.
금송아지는 아무 분별 없이 손쉽게 세워졌다. 그러나 그것을 부수고 무너진 신뢰를 다시 쌓는
일은 후손들의 몫으로 남으며, 원리가 가르치듯 그 탕감에는 몇 세대가 걸린다. 선택의 시간은 길지 않다. 원리로 돌아갈 것인가, 우상 앞에 머물 것인가. 진실을 붙들 것인가, 권력의 노예가 될 것인가. 침묵하는 자도 선택한 것이며, 동조하는 자도 선택한 것이다. 역사는 그 선택을 하나도 빠짐없이
기록할 것이다.